[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무위이치'의 곡식, 율무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몸이 무겁다. 다리가 잘 붓고, 머리는 맑지 않으며, 이유 없이 피곤하다. 잠을 충분히 잔 것 같은데도 개운하지 않다. 양생학은 이런 상태를 한 글자로 설명한다. 바로 '습'(濕)이다. 몸속에 고여 흐르지 못하는 물기, 빠져나가지 못한 수분과 노폐물이 기혈의 길을 막고 있는 상태다.
양생학에서 습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완강한 적이다. 서서히 몸을 무겁게 만들고, 관절을 뻣뻣하게 하며, 마음마저 탁하게 만든다. 이 습을 다스리는 일은 큰 결단이나 강한 약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단정한 음식 하나가 오랜 세월 그 역할을 맡아 왔다. 바로 율무, 한약명으로 의이인(薏苡仁)이다.
율무는 겉모습부터 남다르다. 껍질을 벗기기 전의 알곡은 눈물방울처럼 생겼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욥의 눈물'(Job's tears)이라 불린다(욥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시험을 받아 큰 슬픔과 시련을 겪음). 동양에서는 그 모양이 진주를 닮았다 하여 귀하게 여겼고, 아이들 손에 쥐어 염주나 구슬로 쓰이기도 했다. 곡식이면서도 장식이 되고, 음식이면서도 약이 되는 존재. 율무는 언제나 경계에 서 있는 곡물이었다.
◇ 율무의 약선학
약선으로 본 율무의 성질은 분명하다. 맛은 달고 담백하며(甘淡), 성질은 서늘하다(性凉). 들어가는 장부는 비·위·폐다. 쉽게 말해 비장과 위장을 도와 소화의 질서를 세우고, 몸속에 고여 있는 물을 밖으로 내보내며, 폐와 피부에 맺힌 열과 고름을 식혀 준다. 그래서 율무의 효능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이수(利水), 건비(健脾), 배농(排膿). 물길을 열고, 소화력을 세우며, 고인 것을 배출하는 힘이다.
본초강목은 이렇게 기록한다. "율무는 양명(陽明)의 약이다. 비장을 튼튼히 하고 위를 이롭게 하며, 근육과 관절의 병을 다스리고, 습을 제거해 부종과 설사를 치료한다." 이 한 문장 안에 율무의 성격이 모두 담겨 있다. 과하지 않고, 빠르지 않으며,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율무가 특히 잘 맞는 사람이 있다. 몸이 자주 붓는 사람, 다리가 무겁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사람, 비 오는 날이면 컨디션이 뚝 떨어지는 사람이다. 양생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습이 아래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율무는 이 습을 소변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힘이 매우 부드럽다. 강한 이뇨제처럼 기운을 소모시키지 않고, 몸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천천히 정리한다. 그래서 '본초신편'에서 "율무는 물을 가장 잘 빼내되, 참된 기운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 영양학으로 보아도 율무의 성분은 주목할 만하다. 칼륨과 마그네슘 같은 무기질이 풍부해 체내 나트륨 균형을 맞추고, 식이섬유가 장의 수분 대사를 돕는다. 율무 100g에는 단백질이 약 15%나 들어 있으며, 지방은 3~7%로 대부분 불포화지방산이다. 여기에 비타민 B군, 철, 아연, 칼슘이 고르게 들어 있다. 특히 율무유와 율무다당체는 면역세포의 기능을 조절하고 염증 반응을 완화하며, 혈당과 혈중 지질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실제로 율무유를 원료로 한 항암 보조제 '캉라이테'(Kanglaite)는 간암, 폐암, 위암 치료의 보조요법으로 임상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이 있다. 율무는 기적의 약이 아니라 생활의 약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한 날 한 번 먹고 끝낼 음식이 아니다. 밥상 위에서, 매일의 리듬 속에서 조금씩 몸을 바꾸는 곡식이다.
율무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오래전부터 쓰였다. 동의보감에는 "율무는 사람의 성정을 부드럽게 하고, 질투심을 누그러뜨린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비유만이 아니다. 몸속의 습과 열이 줄어들면 마음의 답답함도 함께 가라앉는다. 양생학이 말하는 핵심은 언제나 하나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율무죽은 중풍 후유증 환자, 고열로 근육이 뭉친 사람, 오래 피로가 쌓여 회복이 더딘 사람에게 대표적인 회복식으로 쓰여 왔다.
다만 섭취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율무는 성질이 서늘하므로 몸이 차고 마른 사람에게는 생율무보다 볶은 율무가 낫다. 밥에 넣을 때는 충분히 불리고, 차로 마실 때는 노릇하게 볶아 향을 낸다. 부종이 심할 때는 팥이나 적소두와 함께 쓰고, 소화가 약할 때는 쌀과 대추를 더해 죽으로 끓인다. 단, 임신 초기에는 피해야 한다. 율무에는 자궁 수축을 유도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율무는 빠른 약이 아니다. 먹자마자 눈에 띄는 변화도 드물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몸이 한결 가볍고 다리가 덜 붓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유 없이 가라앉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도교 양생에서는 이를 '무위이치'(無爲而治)라 부른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상태. 율무는 말없이 그렇게 일한다.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필요한 것만 남긴다.
◇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율무의 효능
손자병법은 전쟁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끝내는 삶의 태도로 귀결된다. 그 첫 장이 바로 '시계'(始計)의 장이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승패를 계산하라는 가르침이다. 손자는 전쟁은 나라의 큰일이니,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계산하라고 했다. 여기서 계산은 숫자가 아니다. 형세를 살피고, 사람을 보고, 환경을 읽는 일이다.
양생도 마찬가지다. 병이 깊어져 약을 찾기 전에, 몸이 무너지기 전에, 먹는 것부터 살피는 것이 시계의 지혜다. 그 시작의 곡식이 바로 율무다.
손자병법 시계는 다섯 가지를 묻는다.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 이를 몸에 비추면 이렇게 바뀐다. 마음이 편안한가. 계절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는가. 몸의 순환은 막히지 않았는가. 나를 돌보겠다는 결심이 서 있는가. 먹고 자는 법이 질서 있는가.
이 질문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때, 몸은 신호를 보낸다. 붓고, 무겁고, 피곤하고, 이유 없이 가라앉는다. 양생에서는 이를 습이 쌓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계의 단계에서 이 습을 다스리는 가장 온화한 선택이 바로 율무다.
율무밥은 화려하지 않다. 쌀에 몇 숟가락 섞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밥은 시작을 바로잡는 밥이다. 율무는 비장을 돕고, 비장은 온몸의 물길을 관리한다. 비장이 약해지면 먹은 것이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몸에 고여 습이 된다. 율무밥은 말없이 말한다. "서두르지 말고, 기본부터 다져라." 손자병법 시계의 핵심도 바로 이것이다. 승리는 이미 시작에서 결정된다.
율무죽은 전쟁으로 치면 정찰이다. 몸이 약할 때, 기운이 떨어졌을 때, 율무죽은 먼저 묻는다. 지금은 밀고 나갈 때인가, 쉬어야 할 때인가. 율무죽은 속을 덥히지도, 과하게 식히지도 않는다. 그저 부담을 덜어 준다. 노자는 말한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 율무죽은 그 부드러움으로 몸의 경계를 허문다.
율무를 샐러드로 먹는다는 것은 율무를 약이 아니라 생활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몸도 복잡해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더함이 아니라 덜어냄이다. 율무는 지방을 억지로 태우지 않고, 불필요한 수분부터 정리한다. 그래서 몸이 가벼워진다. 손자의 말처럼, 이길 수 있는 전쟁만 하는 선택이다.
율무떡은 기념의 음식이자 시작의 음식이다. 돌과 혼례, 제사와 새해. 여기에 율무떡은 지속의 의미를 더한다. 율무는 근육과 관절을 서서히 살린다. 급하지 않다. 대신 오래 간다. 시계의 장에서 손자가 강조한 것도 이것이다. 속전속결이 아니라, 지치지 않는 준비.
율무차를 끓이면 향은 강하지 않다. 대신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몸의 습이 빠지면 마음의 탁함도 함께 가라앉는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군사의 마음이다. 삶에서도 그렇다. 율무차 한 잔은 오늘 내 마음이 전투 상태인지, 휴식 상태인지 스스로 묻게 한다.
손자병법 시계의 장은 싸우는 법이 아니라 싸우지 않기 위한 준비다. 율무 또한 병이 생긴 뒤 고치는 약이 아니라, 병이 생기지 않게 하는 곡식이다.
밥으로, 죽으로, 샐러드로, 떡으로, 차로. 율무는 늘 시작의 자리에 있다. 오늘의 몸을 살피고, 내일의 균형을 계산하는 것. 그 첫 선택으로 율무 한 숟가락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 그래서 율무구나. 시작을 바로잡는 곡식, 저속 노화의 가장 오래된 답이 바로 여기 있구나.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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