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겨울 바다의 양생 선물, 홍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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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닷바람이 차가워질수록 우리 밥상에 자주 오르는 음식이 있다. 포장마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홍합탕 한 그릇, 집에서 끓여낸 홍합미역국, 아이들의 이유식으로 쓰였던 담채죽까지 다양하다. 홍합은 특별히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조용히 지켜준, 바다의 오랜 양생 식재료다.
약선학에서는 홍합을 담채(淡菜)라 부른다. 본초강목에는 '홍합은 바다의 해조 기운을 머금어 목의 혹을 다스린다'고 기록돼 있다. 이름처럼 맛은 담백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담백함 속에 깊은 힘이 숨어 있다.
양생학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맞추는 지혜다. 홍합은 맛이 달고 짠 편이며 성질은 따뜻한 온성(溫性)이다. 차가운 겨울철, 기혈이 수축되기 쉬운 때에 몸을 무리 없이 덥혀주는 음식이다. 특히 간(肝)과 신(腎)으로 귀경해 피와 정(精)을 보하고, 인체의 근본을 다진다.
옛사람은 '신장이 튼튼해야 뼈가 곧고 정신이 맑다'고 했다. 홍합은 신장을 보하는 대표적인 바다 음식으로, 허약으로 인한 어지럼증, 식은땀, 허리 통증, 빈혈, 여성의 월경통 등에 두루 활용돼 왔다. 이는 그저 기운을 끌어올리는 음식만이 아니고 지친 몸의 바닥을 천천히 채워주는 음식이다.
도교에서는 이를 '보이부조'(步而不躁)라 했다. 한 걸음씩 나아가되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다. 인삼처럼 급하게 끌어올리는 보양이 아니라, 홍합처럼 은근히 스며들어 채우는 것이 진짜 양생이다.
현대 영양학적으로 보아도 홍합은 매우 뛰어난 식품이다. 100g당 열량은 70~90kcal로 낮은 편이지만, 단백질·철분·칼슘·인·요오드가 고르게 들어 있다. 특히 철분과 비타민 B군이 풍부해 빈혈 예방과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된다. 흡수율이 좋은 철분은 성장기 청소년과 노년층 모두에게 유익하다.
또한 홍합에 풍부한 타우린과 오메가 계열 지방산은 혈액순환을 돕고 심혈관 건강을 지켜준다. 실제 연구에서도 홍합은 동맥경화 억제, 혈액 점도 개선, 혈액순환 촉진 효과가 있다고 나와 있다. 노화 억제, 항산화 작용, 항응고 작용, 심장 리듬 안정 등 다양한 생리 작용 역시 확인되고 있다. 옛 문헌에서 말한 '익정혈'(益精血)이라는 표현이 현대 과학으로 다시 해석되고 있는 셈이다.
홍합은 우리 민족의 삶이 축적된 기록이다.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은 홍합 수백 마리가 암초에 붙어 조수의 흐름에 따라 입을 여닫으며 자란다고 했다. 이는 자연의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생명의 모습이다. 억지로 나아가지 않고, 흐름에 자신을 맞춘다.
홍합을 삶아 말린 담채는 한때 중국으로 수출될 만큼 귀한 식품이었다. 기름기가 없고 소화가 잘돼 어린아이의 이유식, 병후 회복식으로 널리 쓰였다. 담채죽은 '약이 되는 밥'이었다. 밥 한 그릇으로 생명을 지켜낸 역사다.
강원도 북부의 향토 음식인 섭죽 역시 홍합 문화의 연장선이다. 쌀과 감자, 고추장을 넣어 끓인 이 음식은 혹독한 겨울철 쇠약해진 몸을 따뜻하게 달래줬다. 이는 개인의 음식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린 생존 음식이었다.
'식료본초'에는 홍합을 무, 자소엽, 동과피와 함께 끓이라고 했다. 이는 홍합의 따뜻한 성질을 부드럽게 조화시키는 지혜다. 음식은 언제나 균형이 핵심이다. 우리나라에서 홍합미역국이 발달한 것도 같은 이치다. 미역은 찬 성질로 혈을 맑게 하고, 홍합은 따뜻하게 보한다. 둘이 만나 음양이 조화된다. 출산 후 산모에게 홍합미역국이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홍합 음식
손자병법에는 '강한 것은 부드러움에 꺾이고, 급한 것은 느림에 막힌다'고 했다. 홍합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흐르는 물을 여과해 영양을 얻는다. 이는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모습이다. 억지로 취하지 않고, 자연이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우리 몸도 이와 같을 때 비로소 저속노화의 길로 들어선다.
물론 주의도 필요하다. 옛 문헌에는 홍합을 과다 섭취하면 머리가 무겁고 기운이 처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양생의 핵심은 언제나 절제다. 특히 신장이 약하거나 소화력이 약한 사람은 국이나 죽 형태로 소량씩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음식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홍합을 손자병법 '구지'(九地)의 눈으로 바라봤다. 구지는 전쟁 기술의 장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자리에 놓였을 때 살아남는가, 어떻게 스스로를 살려내는가를 말하는 장이다. 손자는 전장을 아홉 가지 땅으로 나눴다. 산지, 경지, 쟁지, 교지, 구지, 중지, 비지, 위지, 그리고 사지(死地). 그러나 이 모든 지형을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다.
형세에 맞게 몸과 마음을 바꾸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지혜는 전쟁터에만 머물지 않는다. 밥상 위에도, 불 위 냄비 속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그 해답을 홍합에서 찾아봤다.
구지의 핵심은 이것이다. 땅이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져야 한다. 편안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느슨해지고, 막다른 자리에 이르러서야 온 힘을 모은다. 홍합은 늘 극한의 자리에 산다. 암초에 붙어 파도와 조류, 추위와 더위를 그대로 견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형세에 맞게 몸을 연다.
물이 들어오면 입을 열고, 물이 빠지면 닫는다. 이것이 구지의 생존법이다.
산지에서는 마음을 흩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홍합죽은 그런 음식이다. 기름기 없고 맑으며, 속을 부드럽게 감싼다. 정을 모으고 기혈을 가다듬는다. 경지에서는 방심을 경계해야 한다. 홍합밥은 몸의 중심을 잡아준다.
쟁지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홍합탕은 불과 물의 균형 속에서 판단력을 길러준다. 교지에서는 관계가 생명이다. 홍합조림은 조절과 중용의 가르침이다. 중지와 비지에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홍합전과 볶음은 순간의 에너지를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이 사지다. 물러설 곳이 없는 자리다. 홍합은 늘 사지에 산다. 파도가 거세면 부서질 수 있고, 물이 빠지면 말라 죽는다. 그러나 홍합은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껍질을 더욱 단단히 닫고 때를 기다린다. 이것이 손자가 말한 사지의 지혜다.
"도망치지 말고, 버티되 거스르지 말라."
구지는 먼 전쟁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할 때, 병상에도 있고, 노년에도 있으며, 가난과 외로움의 자리에도 있다. 그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거창한 전략이 아니라 몸을 살리는 한 그릇의 음식이다. 형세를 읽고, 때를 알면 저속노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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