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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몸과 마음 치유하는 양생법, 팥-①

  • 연합뉴스
  •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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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몸과 마음 치유하는 양생법, 팥-①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 한국인의 밥상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붉은 곡식 하나가 있다. 바로 팥이다. 작고 소박한 곡식이지만, 그 안에는 2천 년 넘게 한국인의 몸과 정신을 지켜온 의학, 철학, 문화가 겹겹이 쌓여 있다. 팥은 단순히 밥에 넣어 먹는 잡곡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의례, 질병과 치유,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문화 그 자체였다. 동의학에서는 팥을 적소두(赤小豆)라 하여 오랜 세월 인체의 수(水) 기운을 조절하고 독을 풀어주는 귀한 약재로 여겼다. 현대 영양학 또한 팥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필자는 팥이라는 작은 씨앗 속에 담긴 동의학의 지혜, 약선의 원리, 양생의 철학, 그리고 한국인의 문화적 의미를 한 흐름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동의학에서 적소두(赤小豆)는 물길을 트고 부기를 내리며 독을 내보내는 곡식이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몸의 습기와 독을 풀어주고, 혈액과 수분 대사를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심장의 화기를 차분히 하고, 소장의 수분 대사를 도와 이뇨·소종·해독에 탁월하다. '본경'에는 부종을 없애고, 종기·고름·어혈을 배출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본초강목'에서는 열독을 풀고 비위를 돕고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예로부터 큰 수술 후나 산후 회복기, 장염·황달·부종 등에 적소두가 자주 쓰였다. 약재로는 9~30g을 달여 마시고, 종기나 부종에는 외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약선학에서 말하는 "음식은 약(藥)이며 약은 음식이 된다"는 원리는 팥에도 잘 드러난다. 팥 속 사포닌과 칼륨은 천연 이뇨제 성분으로, 약을 쓰지 않고도 몸의 수분 균형을 맞추고 노폐물을 배출해 준다. 난방으로 건조하고 열이 많은 초겨울엔 습열(濕熱)이 몸속에 쌓이기 쉬운데, 이 시기에 팥을 먹으면 장부의 열을 내리고 혈액의 탁함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양생학에서 팥은 자연의 리듬을 따르는 곡식으로 여겨진다. '황제내경'에 따르면 겨울은 만물을 저장하는 계절이다. 이 시기 신장(腎)은 수분과 기운을 안으로 모으며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습이 정체되면 신장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무기력, 부종, 수족 냉증, 피로 등이 생긴다. 이때 필요한 곡식이 바로 습을 없애는 팥이다. 양생학의 관점에서 팥은 기(氣)와 혈(血)의 흐름을 부드럽게 열어준다. 찬 기운으로 수분 대사가 막힐 때 몸 안의 습과 노폐물을 정리하는 '겨울의 청소부'다. 팥죽을 동짓날 끓여 먹는 풍습 또한 단순한 민속행사가 아니라 겨울철 첫 번째 인체 정화(淨化) 의례로 볼 수 있다.

현대 영양학에서도 팥은 해독·이뇨·항산화 효과로 주목받는다. 주요 성분에는 단백질, 탄수화물, 식이섬유, 칼륨, 철분, 비타민 B군, 안토시아닌, 사포닌이 있다. 이 가운데 팥의 독보적인 점은 고칼륨·고사포닌 함유다. 칼륨과 사포닌은 부종을 줄이고 나트륨 배출을 돕는다. 안토시아닌은 항노화·항염·혈관 보호에 효과적이며, 팥의 붉은색은 혈관 건강과 당대사에도 좋다. 식이섬유는 혈당 조절, 포만감 증가, 장 건강 개선에 도움을 주어 체중 조절에도 긍정적이다. 단팥죽이 달아도 팥 자체의 높은 식이섬유 덕분에 혈당 상승을 완화할 수 있다. 현대의학적으로 팥은 과도한 나트륨 섭취, 부종, 스트레스성 위장 문제 등 현대인의 만성 증상 완화에 유익한 식품이다.

한국 문화에서 팥은 음식이자 주술적 힘을 지닌 곡식이었다. 동짓날 팥죽은 귀신을 쫓는 음식이었다. 붉은색은 불(火)과 양기(陽氣)를 상징해 부정한 기운을 몰아낸다고 여겼다. 그래서 집마다 팥죽을 쑤어 문지방이나 장독대, 곳간에 뿌리며 겨울의 어둠 속에서 양기를 불러들이려 했다. 제사상에 팥떡을 올리지 않는 이유도 붉은색이 귀신을 부르는 색이 아니라 귀신을 쫓는 색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사에는 껍질을 벗긴 흰 고물 떡을 올렸다.

팥은 또한 한국의 전통 단맛 문화를 만들어낸 재료였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팥은 천연의 단맛을 내는 가장 손쉬운 곡식이었다. 붕어빵, 국화빵, 단팥죽, 찐빵, 양갱, 떡고물 등 우리의 간식 문화 한가운데 항상 팥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식문화가 아니라 절약과 지혜, 어려운 삶 속에서도 단맛을 찾아낸 민중의 철학을 반영한다.

동아시아 각국은 팥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에서는 팥을 해열과 해독의 곡식으로 보아 여름철 습열 질환 치료에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붉은색을 경사의 상징으로 여겨 팥밥을 짓는 것을 축하의 표현으로 삼았다. 한국에서는 팥이 귀신을 쫓는 양기의 상징이었으며, 일본에서는 경사를 부르는 곡식, 중국에서는 열과 독을 다스리는 약으로 쓰였다. 같은 팥이라도 각 나라의 자연환경과 철학에 따라 다른 문화적 의미로 확장된 셈이다.

결국 팥은 작은 곡식이지만, 동아시아의 지혜가 응축된 '붉은 생명'이다. 2천 년 넘게 아시아인의 밥상과 약방을 지켜온 것은 물길을 열고 피를 맑게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부정을 쫓으며 삶에 단맛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동의학은 팥을 해독·소종의 약재로, 약선학은 음식으로 병을 다스리는 곡식으로, 양생학은 겨울 정화의 곡물로 보았다. 현대 영양학은 이를 항산화·이뇨·해독의 과학적 식품으로 인정한다. 한국인은 여기에 붉은 양기와 마음의 위로를 더해 풍습과 의례로 승화시켰다.

작은 팥 한 톨 안에는 동아시아의 의학·문화·철학·지혜가 담겨 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도 팥죽을 끓이고, 팥고물을 떡 위에 올리고, 붕어빵 속에 팥소를 넣는 이유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팥의 붉은 기운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채운다. 이는 단순한 영양을 넘어 세대를 이어온 우리 민족 K-푸드의 양생 철학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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